과학기자가 미리 본 2013년 어느 노부부 이야기
2003-10-28 09:43:45 read : 3946
늙은 부부 단둘이 살기에 집안 일도 벅차고 해서
4년 전 들여온 로봇 덕에 목숨 건질 줄이야
옛날 진공관 TV의 화면이 서서히 밝아지듯, 흐릿하던 주변의 사물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하얀 천장과 형광등, '틱틱'소리를 내며 이상한 선이 그려지는 기계, 대롱대롱 달린 링거액 병, 마누라 얼굴….
병실인 듯했다. 그래, 마지막 기억나는 게 뭐더라.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 건강검진 때 의사가 심장이 안 좋다고 했는데,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하긴 7순이 넘었으니 고장이 날 만도 하지.
마누라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뭐라 해야 할지, 별로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쓰러진 나를 난리쳐가며 병원으로 옮겼을텐데.
"고생했소."
"의사가 그러는데 응급실에 조금만 늦게 왔으면…. 툴툴이 덕이에요."
"툴툴이?"
툴툴이는 집안일을 하는 로봇이었다.머리.몸통.팔이 있고, 다리 대신에 바퀴가 달렸는데, 좀 잘못 만들었는지 굴러갈 때 '툴툴툴'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애 둘을 다 분가시키고 늙은 부부만 살기에는 집안일도 벅차고 해서 4년 전에 하나 장만했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옮겼겠어요. 툴툴이가 안고 왔죠."
"그놈이…."
툴툴이는 청소도 하고, 간단한 심부름도 했다. 말귀도 좀 알아듣고 딱딱한 전자 합성음으로 대꾸도 한다. 할인점에서 잔뜩 산 물건을 나르는 것은 당연히 툴툴이의 몫이었다.
툴툴이가 온 뒤로 부부끼리 여행도 자주 다녔다. 아무리 아파트라지만 따로 집 볼 사람이 없어 며칠씩 비우기가 꺼림칙했는데, 툴툴이가 있으니 든든했다.
단점이라면 쓰레기 분리 수거 프로그램 입력이 제대로 안된 데다가, 어찌된 일인지 그것만은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애들한테 그런 불평을 했더니"요즘은 훨씬 똑똑하고 말도 잘하고 전기도 적게 드는 로봇이 나왔다"며 새로 사 주겠다고 했지만, 막상 그렇게까지 얘기가 나오고 보니 왠지 정든 툴툴이를 버리기 싫어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놈이 생명의 은인이 된 셈이었다.
툴툴이가 나를 웃기던 일들이 떠올랐다. 마누라가 만든 파전을 입이라고 모양으로만 달린 곳에 넣고는 "맛있다"고 하던 것, TV 코미디 프로그램을 함께 보다 전자음으로 웃음 소리를 내던 것, 2010년 월드컵 본선 시합을 보면서 저도 '대~한민국'을 외치던 것, 설날 허리만 굽혀 인사하듯 세배하고는 세뱃돈 달라고 떼쓰던 것. 우리 아들놈한테 '형'이라고 했던 것….
'툴툴툴'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쇠로 된 얼굴이 병실에 나타났다. 무표정. 손을 들어 제 뒤통수를 긁는 게 우스웠다. 사람이 하는 짓은 다 하는구나. 가려울 리는 없고, 대체 무슨 이유로 뒤통수를 긁었을까. 저놈도 '마음'이란 게 있는 걸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늘그막에 자식 하나 더 얻었구나. 툴툴이라 하지 말고 내 성을 따서 이름을 새로 지어줘야겠다. 그래, 아파트는 전문 경비업체에 맡기고 앞으로는 여행갈 때도 같이 데리고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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